후쿠모토 유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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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모토 유타카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1969년부터 1988년까지 한큐 브레이브스(현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활약했다. 그는 통산 1065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세계 기록을 세웠으며, 13년 연속 도루왕, 12년 연속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1972년에는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했고, 1983년에는 루 브록의 세계 통산 도루 기록을 경신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와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2002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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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모토 유타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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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일 | 1947년 11월 7일 |
출생지 | 오사카부오사카시이쿠노구 |
선수 정보 | |
포지션 | 외야수 |
투구/타석 | 좌투/좌타 |
프로 입단 연도 | 1968년 |
드래프트 순위 | 드래프트 7위 |
소속 구단 | 한큐 브레이브스(1969 ~ 1988) |
첫 출장 | 1969년 4월 12일 |
마지막 출장 | 1988년 10월 23일 |
배팅 평균 | .291 |
홈런 | 208 |
안타 | 2,543 |
도루 | 1,065 |
수상 경력 | 3x 일본 시리즈 우승 (1975–1977) 퍼시픽 리그 MVP (1972년) 일본 시리즈 MVP (1976년) |
명예의 전당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2002년) |
감독 및 코치 경력 | |
코치 | 오릭스 브레이브스/오릭스 블루웨이브 (1989–1991) 한신 타이거스 (1998–1999) |
유튜브 채널 정보 | |
채널 이름 | 세계의 도루왕 후쿠모토 유타카 채널 |
채널 URL | https://www.youtube.com/channel/UCvS7bc8DlUH-ITmPlJUaESg |
개설일 | 2020년 12월 31일 |
활동 시작일 | 2021년 1월 6일 |
장르 | 야구 |
구독자 수 | 1.56만 명 |
조회수 | 1,256,287회 |
웹사이트 | https://www.instagram.com/yutaka_fukumoto_2_official/ |
직업 | 전 프로 야구 선수 코치 2군 감독 해설자 평론가 탤런트 유튜버 |
2. 프로 입단 전
후쿠모토 유타카는 오사카시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 야구를 시작했다. 다이테쓰 고등학교 시절에는 팀의 첫 고시엔 대회 출전을 경험했고,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 마쓰시타 전기에 입단하여 도시 대항 야구 대회 우승에 기여하는 등 활약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6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에 7순위로 지명되어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한편, 그의 부인은 야구에 대해 잘 몰라 후쿠모토가 프로 야구 선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한동안 알지 못했다. 후쿠모토가 "마쓰시타에서 한큐로 전직한다"고만 설명했기 때문에, 부인은 남편이 한큐 전철의 역무원으로 근무하는 줄 알고 각 역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한 역무원으로부터 "혹시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람이 도루왕 후쿠모토는 아닌가?"라는 말을 듣고서야 남편이 야구 선수임을 알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2. 1. 유년 시절 및 고등학교 시절
오사카시 이쿠노구 하라미초에서 태어났다.[10] 초등학교 3학년 때, 고무공을 손이나 각목으로 치는 방식의 놀이인 "삼각 베이스볼"을 통해 처음 야구를 접했다.[10]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라면집을, 어머니가 이불 수선 가게를 열면서 후세시 (현 히가시오사카시)로 이사했다.[11] 이사 후에는 부모님의 가게 일을 돕기도 했다.[11] 어릴 때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이었다고 한다.[12]후세 시립 후세 제3중학교 (현 히가시오사카 시립 가나오카 중학교) 시절에는 준경식 야구부에 소속되었다.[13] 2학년 때까지는 후보 선수였으며, 연습 중에 강에 빠진 공을 찾으러 다니기도 했다.[13] 3학년 때 참가한 오사카 중학교 우승 대회에서 1루수로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14]
고등학교는 어머니의 사촌이 씨름부 감독으로 있던 다이테츠 고등학교로 진학했다.[15] 입학 초기, 상급생들의 기합 등으로 1학년 부원 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감독이 1학년들을 아침 훈련에 불렀다. 이때 프리 배팅 연습에서 타격 능력을 인정받아 1군 연습에 참가하게 되었다.[16] 우익수 수비 연습 중, 내야 땅볼 상황에서 송구가 빗나갈 경우를 대비해 꾸준히 1루 베이스 커버를 하는 모습을 본 감독으로부터 "야구를 잘 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여름 지역 예선부터 주전 우익수로 뛰게 되었다.[16] 2학년 가을부터는 중견수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타순도 1번을 맡게 되었다.[16]
1965년, 고등학교 3학년 여름에는 제47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고시엔)에 출전했다.[17] 이는 다이테츠 고등학교 역사상 첫 여름 고시엔 출전이었다. 1회전 상대는 해당 대회 4강까지 진출한 아키타 고등학교였다. 경기는 연장 13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후쿠모토가 지키던 중견수와 2루수 사이에 떨어지는 안타를 맞아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18][17] 후쿠모토는 당시 상황에 대해, 서로 소리를 지르며 소통하지 않았고, 후퇴해야 할 2루수보다는 전진할 수 있는 중견수인 자신이 처리했어야 할 타구였다고 회상하며 자신의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술회했다.[17]
고등학교 시절 1년 후배 팀 동료로는 훗날 프로에서 활약하게 되는 다카하시 후미오 (전 세이테츠→태평양, 롯데 소속 외야수)가 있었다.
2. 2. 사회인 야구 시절
고교 졸업 후에는 사회인 야구 팀인 마쓰시타 전기(현 파나소닉)에 입단했다. 여러 대학에서도 입학 제의가 있었지만, 후쿠모토는 대학 야구의 체육회적 분위기, 특히 선배들의 폭력 등을 싫어했고, 사회인 야구팀에서는 그런 문제가 적을 것이라고 생각해 마쓰시타 전기를 선택했다.[19] 빠른 발이 무기였기 때문에 감독으로부터 "(준족의 슈퍼스타였던) 히로세 스미코가 되어라"라는 말을 들었고, 당시 히로세의 등번호인 12번을 달고 히로세의 경기를 자주 관전하러 다녔다고 한다. 후쿠모토는 훗날 "히로세 씨는 신과 같은 존재였어요. 프로에 들어가서도 그건 똑같았어요. 여전히 구름 위의 존재였죠"라고 회고했다.[20]입단 1년 차인 1966년부터 외야수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같은 해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2번 타자로 출전하여 3루타를 치는 등 활약했다. 사회인 3년 차인 1968년에는 동료인 가토 히데지(훗날 가토 에이지로 개명)와 오카다 미쓰오(전 긴테쓰)와 함께 후지 제철 히로하타의 보강 선수로서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했다. 오카다와 칸베 토시오의 호투에 힘입어 결승에 진출했고, 가와이 악기를 꺾고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21] 8월에는 알래스카 골드 파너스[22]와의 미일 친선 야구 경기에 출전했다. 같은 해 사회인 베스트 나인으로 선정되었지만, 후쿠모토 본인은 "아마추어 시절에는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같은 해 가을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7순위 지명을 받았다. 입단 당시 등번호는 40번이었다. 이 해 드래프트는 "역사상 전례없는 풍작 드래프트"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는데,[23] 한큐는 1순위 야마다 히사시, 2순위 가토 히데지에 이어 후쿠모토까지, 훗날 명구회에 입성하는 선수를 3명이나 지명했다. 한편, 난카이 호크스도 일찍부터 후쿠모토의 빠른 발에 주목했지만, 168cm의 작은 키 때문에 감독 쓰루오카 가즈토가 영입을 반대했다고 한다.
프로 입단의 계기는 마쓰시타 전기 시절 이미 아마추어 야구 스타였던 후배 가토 히데지를 보러 온 스카우트의 눈에 띈 것이었다. 스카우트가 와 있던 경기에서 홈런을 치거나, 도시 대항 야구에서 홈으로 정확한 송구를 하는 등의 플레이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 (드래프트 동기인 야마다 히사시가 후쿠모토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이 송구 플레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후쿠모토는 이에 대해 "그때 딱 한 번, 가장 좋은 플레이가 나왔어요"라고 말했다.[24] 다른 저서에서는 1968년 여름 일본 생명 구장에서의 경기에 한큐 구단 매니저 야가타 가쓰히로(후에 구단 상무)와 스카우트 후지이 미치오가 가토를 시찰하러 왔을 때, "덤으로" 리스트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25] 또한, 한큐 외에 접촉이 있었던 구단은 긴테쓰 버팔로스의 스카우트가 "혹시 모르니"라며 주소와 전화번호를 물어본 것(그 후 연락은 없었다고 한다)과, 도시 대항 야구 출전 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자이언츠)의 다마가와 구장에서 연습했을 때 자이언츠 스카우트로부터 "자네는 좋은 선수지만, 아쉽네. 키가 5cm만 더 컸으면…"이라는 말을 들은 것뿐이었다고 한다.[25][26]
후쿠모토 본인은 스카우트들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드래프트 지명 사실을 전혀 몰랐다. 다음 날 아침, 회사 선배가 스포츠 신문을 보고 "뭔가 재밌는 거 실렸어요?"라고 묻자, "재밌는 거라니, 너 지명됐잖아"라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지명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27][29] 하지만 지명 후에도 한큐로부터 며칠간 연락이 없자, 동료들과 본인 모두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실 한큐는 마쓰시타 전기에 여러 차례 연락했지만, 후쿠모토를 보내고 싶지 않았던 마쓰시타 측에서 면담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있었고, 후쿠모토에게는 "너는 키가 작으니 프로에 가봤자 성공 못 한다"며 입단을 만류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쿠모토가 "한 번 이야기라도 들어보겠습니다"라고 마쓰시타 측에 간청하여 겨우 한큐와의 면담이 성사되었다.[28]
면담 자리에서 한큐 구단 직원에게 고기를 대접받고 "프로가 되면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먹을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여러 이유로 입단 결정을 보류했다. 그러는 동안 여러 번 식사 초대를 받으면서 거절하기 어려워졌고,[29] 결국 네 번째 식사 자리에서 입단을 결심했다.[28] 처음에는 계약금 500만엔, 연봉 150만엔의 조건을 제시받았으나, 마쓰시타 전기에서는 "너무 적으니 프로 입단은 그만두라"는 의견이 많았고, 당시 월급(2만 8천 엔)과 상여금이 매년 오르고 있었던 점을 협상에서 이야기하자, 계약금 750만엔, 연봉 180만엔으로 조건이 변경되어 계약하게 되었다.[26][30]
이러한 경위 때문에 후쿠모토는 "마쓰시타 전기에 가토가 있었기 때문에, 저도 한큐 브레이브스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라고 저서에 기록하고 있다.[32]
당시 후쿠모토의 아버지는 긴키 일본 철도의 사원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한큐 입단이 결정되자 "아들과 라이벌 관계가 되는 긴테쓰에 면목이 없다"며 퇴직하고, 한큐 다카라즈카 본선 쇼나이역 근처에 라면 가게를 열었다고 한다.[26]
3. 선수 시절
후쿠모토 유타카는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20년간 활약한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로,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그의 가장 큰 상징은 단연 도루로, 통산 1065 도루는 리키 헨더슨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세계 기록이었으며 "'''세계의 도루왕'''"[5]이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현재도 NPB 통산 도루 1위 기록이며, 시즌 최다 도루(106개)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6][7]
그러나 후쿠모토는 단순히 발만 빠른 선수가 아니었다. 통산 2500안타 이상과 200홈런 이상을 기록한 정교함과 힘을 갖춘 타자였으며, 중견수로서 골든 글러브상을 12회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수비력을 자랑했다. 13번의 도루왕 타이틀은 그의 꾸준함을 보여준다.[8][9] 이러한 공·수·주 삼박자를 갖춘 활약으로 야마다 히사시 등과 함께 한큐 브레이브스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선수 생활 동안 달성한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아 2002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 1. 한큐 브레이브스 (1969-1988)
마쓰시타 전기 회사 팀을 거쳐[1] 1968년 드래프트 7순위로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했다. 입단 초에는 체격이 작다는 이유로 기대를 받지 못했으나,[24] 1년차인 1969년부터 1군 경기에 출전했다. 1969년 4월 12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와의 개막전에 대주자로 첫 출전했으나 도루에 실패했다.[31] 다음 날 경기에서 프로 첫 도루를 기록했다.[31] 그 해에는 38경기 출전에 그쳤고, 시즌 중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지시로 2군에서 타격과 도루 연습에 매진하기도 했다.[33]그러나 2년차인 1970년부터 주전 1번 타자로 정착하여 타율 .274, 시즌 최다인 75도루를 기록하며 첫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듬해 1971년에도 67도루로 2년 연속 도루왕에 올랐다. 1972년에는 등번호를 '''7'''번으로 변경하고, 타율 .301로 첫 3할 타율을 돌파했으며,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유일한 시즌 세 자릿수 도루이자 당시 MLB 기록(모리 윌스의 104개)을 넘어서는 세계 신기록인 '''106도루'''를 달성했다.[1][2][35][36] 이 활약으로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함과 동시에 사상 최초로 퍼시픽 리그 MVP와 도루왕을 동시에 석권했다.
1977년 5월 15일 난카이 호크스전에서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고, 같은 해 7월 6일 난카이 호크스전(니시노미야 구장) 4회에 2루 도루를 성공하며 히로세 요시노리가 보유하고 있던 통산 최다 도루 일본 기록(596개)을 경신했다.[37] 이후 1982년까지 13년 연속으로 도루왕 타이틀을 독점했다. 이 시기 후쿠모토는 출루하면 사실상 2루타와 같은 의미를 지녔으며[39],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벤치의 사인 없이 자신의 판단으로 도루할 수 있는 그린라이트를 부여받았다.[38] 그는 가토 히데지, 나가이케 도쿠지, 야마다 히사시 등과 함께 한큐 황금 시대의 주력 선수로 활약하며 1971년부터 8년간 6번의 리그 우승과 3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1975~1977)에 크게 공헌했다. 특히 1976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타율 .407, 2홈런으로 시리즈 MVP에 선정되었다.[42]
1983년 6월 3일 세이부 라이온스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9회에 3루 도루를 성공하며 루 브록이 보유했던 MLB 기록을 넘어서는 통산 939번째 도루를 기록,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1][44] 당시 세이부 구장에서는 이례적으로 원정팀 선수인 후쿠모토의 기록 달성을 축하하는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후쿠모토는 이 기록을 홈 구장인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달성하고 싶었으나, 경기 상황과 상대 팀의 견제 때문에 의도치 않게 원정에서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고 밝혔다.[44]
도루 세계 기록 달성 후, 당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로부터 국민영예상 수상이 제안되었으나, 후쿠모토는 "서서 소변도 못 보게 된다"[45][46]거나, 오 사다하루와 같은 야구인의 모범이 될 자신이 없고 마작과 흡연을 즐기는 자신이 다른 수상자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고사했다.[5][45][47] 다만 오사카부 지사상(현: 감동 오사카 대상)은 수여받았다. 또한 세계 기록 달성을 기념한 특례 명구회 가입 제안도 사양했으나, 같은 해 9월 1일 롯데 오리온스전에서 타무라 이사오로부터 중전 안타를 쳐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며 정식으로 명구회에 가입했다. 이 해 도루는 55개에 그쳐 60도루를 기록한 오이시 다이지로(긴테쓰)에게 타이틀을 내주며 연속 도루왕 기록이 13년에서 멈췄다.[49] 후쿠모토는 오이시가 자신과 같은 타입의 선수이자 니시모토 감독의 제자였기에 타이틀을 양보하는 마음도 있었다고 술회했다.[49]
1984년 8월 7일에는 통산 1000도루를 달성했고, 이후 기록을 1065개까지 늘렸다. 1987년 4월 18일 롯데전(가와사키 구장)에서 수비 도중 오른쪽 어깨 탈구 부상을 당했으나, 단골 의사의 집중 치료를 받으며 2주 만에 복귀했다.[51] 이는 그의 현역 시절 처음이자 마지막 장기 이탈이었다.[51] 그 해 올스타전에 감독 추천으로 출전하여 도루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올스타전 출전이 되었다.
1988년 시즌에는 후쿠라 준이치, 댈러스 윌리엄스 등이 1번 타자로 주로 기용되면서 후쿠모토의 선발 출장은 23경기에 그쳤고, 총 92경기 출전에 머물렀다.[56] 그럼에도 후쿠모토는 현역 연장 의사를 가지고 있었으나,[57] 시즌 종료 직전인 10월 19일, 브레이브스가 오리엔트 리스(현 오릭스)에 매각된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58] 후쿠모토에 따르면 매각 발표로 인해 선수 겸임 코치 또는 전임 코치에 대한 구단과의 논의가 백지화되었다고 한다.[58]
10월 23일, 한큐 브레이브스로서의 마지막 홈 경기(니시노미야 구장) 종료 후 팬들에게 인사하는 자리에서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이 "떠나는 야마다 히사시, 그리고 남는 후쿠모토"라고 말하려던 것을 실수로 "'''떠나는 야마다, 그리고 후쿠모토'''"라고 발언하는[59] 해프닝이 벌어졌다. 언론의 질문 공세에 후쿠모토는 "우에다 감독님이 말씀하셨다면 그만두겠다"고 답하며 40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후쿠모토는 현역 말년에 출루해도 '기다리라'는 사인이 나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도 은퇴 결심의 한 원인이었다고 술회했다.[24]
이듬해인 1989년 3월 1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오픈전(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야마다와 함께 한큐 유니폼을 입고 은퇴 경기를 치렀다. 후쿠모토는 타석에 들어서 코다 이사오와 대결했다.[172] 이후 코치로 활동하게 될 오릭스 브레이브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베이스 코치를 맡았다.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20년간 활약한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며, 통산 1065 도루는 1993년 리키 헨더슨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세계 기록이었기에 "'''세계의 후쿠모토'''"[4], "'''세계의 도루왕'''"[5]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시즌 106도루, 통산 115 3루타, 통산 299 도루사[6][7]는 여전히 NPB 역대 1위 기록이다. 통산 2543 안타, 208 홈런을 기록하며 정확성과 장타력을 겸비했고, NPB 최다인 13회의 도루왕과 NPB 최다인 12회의 다이아몬드 글러브상(현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8] 또한 14년 연속 시즌 50도루 이상이라는 기록도 세웠다.[9] 빠른 발을 이용한 넓은 수비 범위의 중견수 수비 역시 뛰어났다.
4. 은퇴 이후
1988년 시즌 종료 후, 당시 한큐 브레이브스는 오릭스에 인수되어 오릭스 브레이브스로 재탄생할 예정이었다. 시즌 마지막 경기 후 행사에서 우에다 토시하루 감독은 작별 연설 중 "야마다와 후쿠모토에게 작별을 고합니다..."라고 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본래는 야마다만 팀을 떠나고 후쿠모토는 잔류할 예정이었기에, 후쿠모토 본인을 포함한 모두가 놀랐다. 후쿠모토는 적어도 1년 더 선수 생활을 할 생각이었지만, 기자들에게 "우에다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은퇴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갑작스럽게 선수 경력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는 2,401경기에 출전하여 통산 2,543안타, 208홈런, 449개의 2루타(역대 2위), 115개의 3루타(역대 1위), 884타점, 1,065도루(역대 1위), 타율 .291의 기록을 남기고 은퇴했다.
후쿠모토는 우에다 감독에게 악감정을 품지 않았고, 은퇴 이듬해인 1989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오릭스 브레이브스에서 타격 코치(1989)와 2군 감독(1990-1991)을 맡았고,[63] 이후 한신 타이거스에서도 코치(1998-1999)를 역임했다.[65] 코치직에서 물러난 2000년부터는 아사히 방송, SUN-TV, 후지 TV 등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스포츠 호치에서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2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현역 시절부터 꾸준히 참여해 온 자원봉사 활동의 일환으로 일본 신체장애자 야구 연맹의 명예 이사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155][156] 2006년부터는 한난 대학 야구부 특별 코치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도 기여하고 있다.
4. 1. 지도자 및 해설가 활동
은퇴 이듬해인 1989년 오릭스 브레이브스 1군 타격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으며, 1990년부터 1991년까지는 같은 구단 2군 감독을 역임했다. 1989년 이적해 온 문전 히로미츠의 지도를 맡았는데, 동갑내기인 문전이 현역으로 뛰는 것을 보며 "나도 야구를 계속하고 싶었는데…"라며 아쉬움을 느꼈다고 회상했다.[63]1992년부터 1997년까지 6년간 아사히 방송(현 아사히 방송 텔레비전)과 선 텔레비전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이 기간 중인 1992년 6월 16일, MLB의 리키 헨더슨이 후쿠모토의 NPB 통산 도루 기록(1065개)을 넘어서는 1066번째 도루를 달성했다. 후쿠모토는 기록 달성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직접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헨더슨이 기록을 세운 경기에서 시구를 맡았다. 그는 헨더슨에게 축하의 의미로 금색 스파이크를 선물했고, 헨더슨은 기록 달성 시 사용했던 2루 베이스를 답례로 선물했다. 후쿠모토는 헨더슨의 도루 능력을 "마치 벤 존슨의 출발과 같았다"고 극찬했으며, 헨더슨 역시 후쿠모토를 "존경할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64]
1998년에는 요시다 요시오 감독의 요청으로 한신 타이거스의 1군 타격 코치로 부임했다. 젊은 선수들에게 타격을 가르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기에, 요미우리의 수비 주루 코치 제안을 거절하고 한신을 택한 것이었다.[65] 그러나 감독이 노무라 가쓰야로 교체된 다음 해인 1999년에는 1군 외야 수비·주루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노무라 감독은 후쿠모토의 현역 시절 도루 기술을 높이 평가하여 3루 베이스 코치를 맡기려 했으나, 후쿠모토는 “안타를 칠 수 없으면 주전 선수가 될 수 없다. 주전이 될 수 없으면 출루할 수 있는 확률도 적다. 출루를 할 수 없으면 도루도 할 수 없다”는 지론에 따라 타격 지도에만 집중했고, 결국 1999 시즌을 끝으로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2000년부터는 다시 아사히 방송 텔레비전·선 텔레비전의 야구 해설자 및 스포츠 호치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은퇴 후 지도자, 해설가로 활동하는 동시에 야구계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2006년 1월부터 한난 대학 야구부 특별 코치를 맡고 있으며,[67] 2016년 2월에는 친정팀 오릭스 버팔로스의 스프링 캠프에서 임시 코치로 타격과 주루를 지도하기도 했다.[67] 또한 현역 시절부터 참여해 온 자원봉사 활동의 일환으로 일본 신체장애자 야구 연맹의 명예 이사장을 맡고 있다. 개인 사업으로는 한신 고시엔 구장 인근에서 야구 바 "G.LOVE"를 운영하고 있다.
2002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07년에는 제5회 굿 에이저상을 수상했다. 2011년 5월 7일 홋토못토 필드 고베에서 열린 오릭스 버팔로스 대 지바 롯데 마린스 경기에서는 야마다 히사시, 가토 히데지와 함께 한큐 시절 유니폼을 입고 시구를 하기도 했다.[66]
=== 해설 스타일 ===
후쿠모토의 해설은 직설적이고 독특한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기술적인 설명을 할 때 "고온", "칸", "뿅" 같은 의성어를 자주 사용하며, 시청자가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해설을 지향한다.[149][150]
선수들의 플레이에 대해서도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평가한다. 특히 헤드 슬라이딩에 대해서는 "도달 시간은 차이 없는데 부상 위험만 높인다"[146]며 비판적이며, 발부터 들어가는 슬라이딩을 강조한다.[147] 유니폼 착용법에 있어서도 스타킹을 드러내는 클래식 스타일을 "가장 멋있다", "달리기 편하다", "발 빠른 선수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강력히 권장하며, 무릎을 노출해 스트라이크 존을 어필하는 실용적인 측면도 언급한다.[148]
한신 타이거스의 아카호시 노리히로에 대해서는 그의 헤드 슬라이딩과 다이빙 캐치를 "뛰는 편이 빠르다", "부상 위험이 높다", "잘하는 외야수는 다이빙하지 않고 잡는다"고 지적하며 엄격한 평가를 내렸다. 특히 아카호시가 목 부상을 안고 있던 점을 감안하여 "조만간 큰일 날 겁니다"라고 경고하기도 했다.[151] 반면, 2020년 자신의 연속 경기 도루 기록을 경신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슈토 요시노리에 대해서는 "슈토가 루상에 나가면 나도 그라운드에 있는 듯한 기분으로 설렌다. 팬들의 기대대로 뛰고, 진짜 프로다."라고 평가하고 있다.[102]
해설 중 독특한 발언으로 화제가 되기도 하는데, 장시간 경기가 되었을 때 "가코가와 너머의 사람은 돌아갈 수 없네"라고 발언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발언은 후에 인터넷 슬랭이 되었고,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중계 시 "가코가와의 사람"이 트위터 트렌드에 오르기도 했다.[152] 선 텔레비전 박스석 전시회에서는 그의 발언을 모은 "후쿠모토 유타카 미?! 언어집 보드"가 제작되기도 했다.[152]
4. 2. 기타 활동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1989년에는 친정팀 오릭스 브레이브스의 1군 타격 코치를 맡았고, 1990년부터 1991년까지는 같은 팀의 2군 감독을 역임했다. 1989년 오릭스 코치 시절, 팀에 합류한 베테랑 타자 문전 히로미츠의 지도를 맡게 되었는데, 동갑내기인 문전이 현역으로 뛰는 모습을 보며 "나도 야구를 계속하고 싶었는데…"라는 아쉬움을 느꼈다고 회상했다.[63]1992년부터 1997년까지 6년간 아사히 방송(현 아사히 방송 텔레비전)과 선 텔레비전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이 기간 중인 1992년 6월 16일, 메이저 리그의 리키 헨더슨이 후쿠모토의 통산 도루 기록(1065개)을 넘어서는 1066번째 도루를 달성했다. 후쿠모토는 기록 경신이 임박하자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이를 지켜보았고, 헨더슨이 기록을 세운 경기에서 시구자로 나서기도 했다. 후쿠모토는 헨더슨에게 축하의 의미로 금색 스파이크를 선물했고, 헨더슨은 기록 달성 시 사용했던 2루 베이스를 답례로 선물했다. 후쿠모토는 헨더슨의 도루 능력을 "마치 벤 존슨의 스타트 같다"고 극찬했으며, 헨더슨 역시 후쿠모토를 "존경할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64]
1998년에는 요시다 요시오 감독의 요청으로 한신 타이거스의 1군 타격 코치로 부임했다. 젊은 선수들에게 타격을 가르치고 싶다는 오랜 소망을 이룰 기회였기에, 먼저 제안받았던 요미우리의 수비 주루 코치직을 거절하고 한신행을 택했다.[65] 그러나 이듬해인 1999년, 감독이 노무라 가쓰야로 교체되면서 1군 외야 수비·주루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노무라 감독은 후쿠모토의 현역 시절 도루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3루 베이스 코치를 맡기려 했으나, 후쿠모토는 "안타를 칠 수 없으면 주전 선수가 될 수 없고, 주전이 못 되면 출루 확률도 낮아진다. 출루하지 못하면 도루도 할 수 없다"는 지론에 따라 선수들에게 타격 지도만을 고집했고, 결국 그 해를 끝으로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2000년부터 다시 아사히 방송(현 아사히 방송 텔레비전)과 선 텔레비전의 야구 해설위원, 스포츠 호치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2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6년 1월부터는 한난 대학 야구부 특별 코치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2011년 5월 7일 홋토못토 필드 고베에서 열린 오릭스 버팔로스 대 지바 롯데 마린스 경기에서는 야마다 히사시, 가토 히데지와 함께 한큐 시절 유니폼을 입고 시구를 하기도 했다.[66] 2016년 2월에는 오릭스 버팔로스의 스프링 캠프에서 임시 코치로 타격과 주루를 지도했다.[67] 2007년에는 제5회 굿 에이저상을 수상했다.
현역 시절부터 자원봉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으며, 일본 신체장애자 야구 연맹의 명예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큐 시절 신인 선수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되었던 양로시설 및 요양시설 위문 활동을 의무가 면제된 2년차 이후에도 오릭스 코치 퇴임까지 23년간 꾸준히 이어갔다.[155] 특히 신체 장애인 요양 시설 방문 시 입소자들과 야구를 함께하며 장애인 야구팀 창설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155][156] 또한, 동경했던 나가시마 시게오처럼 팬 서비스를 중시하여 경기장에서 팬들에게 사인을 자주 해주고, 오프 시즌에는 전년도 선수 명감 등을 구단에서 받아 야구 소년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157]
야구 외적으로는 한신 고시엔 구장 근처에서 "G.LOVE"라는 이름의 야구 바를 운영하고 있다. 가게 내부에는 자신의 한큐 시절 유니폼이나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의 좌석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현재는 총 3개 점포로 확장 운영 중이다.
상당한 다카라즈카 가극단 팬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여성들이 주로 보는 것이라는 편견 때문에 꺼렸으나, 2006년 처음 관람한 후 매력에 빠졌다고 한다.[158] "규율과 예의 바름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무대에 매료되었다"고 밝히며[159], "나를 만나고 싶다면 월요일에 다카라즈카에 오면 된다"고 말할 정도다.[160] 2014년 다카라즈카 가극단 100주년 기념 대운동회에서는 하이라이트 경기인 조별 대항 릴레이의 스타터를 맡기도 했다.[161] 라쿠고도 즐겨 들으며, 자신의 가게에 쇼후쿠테이 긴페이 등 친분 있는 라쿠고가를 초청해 정기적으로 라쿠고회를 열고 있다.[160] 쇼후쿠테이 니치는 후쿠모토를 소재로 한 창작 라쿠고를 여러 편 발표하기도 했다.
낚시가 취미로, 현역 시절 기분 전환을 위해 아마가사키시나 니시노미야시 해안, 포트 아일랜드 등지를 찾았다.[162][163] 1988년 10월 19일, 브레이브스 매각 소식이 전해진 밤에는 보도진을 피해 무코가와 하구에서 밤낚시를 했으나, 롯데-킨테츠전 라디오 중계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낚시를 즐길 심경이 아니었다고 술회했다.[163]
결혼 당시, 감독 니시모토 유키오는 선수 기용의 공정성을 위해 중매를 서지 않겠다고 했으나, 후쿠모토가 먼저 니시모토의 이름을 중매인으로 넣은 청첩장을 인쇄한 뒤 "이미 모두에게 돌렸다"고 부탁하여 결국 승낙을 받아냈다는 일화가 있다. 후에 야마다 히사시와 가토 히데지의 중매도 니시모토가 맡았다.[153] 1983년 4월 30일에는 밤프 윌리스와 함께 경주마(징크 피어리스)와 달리기 시합을 하는 이벤트에 참여했다.[154][5] 구단이 선수들과 상의 없이 언론에 먼저 발표한 이벤트였고, 후쿠모토는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팬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참여했다고 한다.[154] 경주 자체는 말이 미끄러져 제대로 된 승부가 되지 않았지만(밤프 윌리스 승리[5]), 이벤트 덕분에 경기장에 많은 관중(약 2만 8천 명)이 찾아와 기뻤다고 후일 말했다.[5] 또한, 시즌 도루의 MLB 기록 경신이 가능했던 1972년에는 구단으로부터 "도루 예고"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상대에게 미안하다는 이유로 거절하다가 팬 서비스 차원에서 볼넷 출루 시 손을 드는 것으로 대신했다.[144] 이에 대해 "상대 포수에게 미안한 짓을 했습니다. 정말 실례되는 짓을 했고, 죄송한 마음이 더 크네요."라고 말했다.[144]
펀치 사토가 전하는 일화에 따르면, 2군 감독 시절 후쿠모토는 휴일 전날 선수들에게 "내일 쉬는 날이라고 스마 해안에 가서 바다에 들어가지 마라. 몸이 차가워진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다음날 주의를 어기고 스마 해안에 간 펀치 사토는 그곳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수영복 차림의 후쿠모토가 선탠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164]
현역 시절 선수 응원가는 미국의 애국가 "양키 두들"을 개사한 곡이었으며, 이 곡은 후에 가사가 수정되어 이치로에게 사용되었고, 카네코 치히로에게도 쓰인 적이 있다. 야구는 좌투좌타지만 글씨는 오른손으로 쓰며[165], 젓가락은 왼손으로 사용한다.[166]
2021년 시즌 종료 후, 최근 일본 프로야구의 도루 수 감소 경향에 대해 "웃기네요", "최악이네요, (나라면) 40개는 하고 싶어요", "적잖아요. 좀 더, 역시 달려야 합니다. 경기 수는 140경기(2021년은 143경기)나 있으니까요. 20개(로 도루왕)는... 화낼 수도 있지만, 저 100개 넘게 했을 때는 한 달에 했습니다."라며 24도루로 4명의 선수가 공동 도루왕에 오른 당시 퍼시픽 리그 상황을 비판적으로 언급했다.[167]
5. 선수로서의 특징
후쿠모토는 도루뿐만 아니라 타격과 수비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선수였으며, 그의 선수 생활은 뛰어난 기록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대표된다.
17년 연속 규정 타석 달성과 시즌 전 경기 출장 8회는 모두 퍼시픽 리그 타이기록으로, 그의 꾸준함과 강인함을 보여준다.[24][140][141] 한큐의 두터운 외야수 선수층 속에서 주전 자리를 확보했을 때, 동료 오쿠마 타다요시로부터 부상으로 쉬면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조언을 듣고, 웬만한 부상으로는 쉬지 않는 강한 몸을 만들고자 노력했다.[24][140][141] 주전 시절에도 여러 시즌 풀타임 출장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감독 우에다 도시하루가 우승 확정 후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라는 지시를 따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142] 그는 키누가사 사치오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2215경기)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만약 기록을 의식했다면 "반드시 도전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142][143]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 시절, 시즌 도루 기록을 경신한 1972년에는 우승 결정 후 "부상당하면 안 되니 쉬어라"는 지시에 따라 출전 의사에도 불구하고 결장하기도 했다.[144]
또한, 2017년 기준으로 한큐 및 오릭스 출신 토종 선수로는 유일하게 통산 2000안타와 2000경기 출장을 동시에 달성한 선수이다. 비록 타격 3관왕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꾸준한 활약을 통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현역 시절 등번호 '''7'''번은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준영구 결번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은퇴 전후 모기업이 한큐 전철에서 오릭스로 변경되는 등의 과정에서 정식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지는 못했다. 1991년 드래프트 1순위 타구치 소에게 7번이 제안되었으나 고사했고, 이치로 역시 1994년 시즌 210안타를 기록한 후 7번 변경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2001년에는 후쿠모토 본인의 동의 하에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에서 이적해 온 신도 타츠야가 7번을 달았고, 신도 은퇴 후에는 히다카 츠요시가 이어받았다. 2004년 구단이 긴테쓰와 합병하여 오릭스 버팔로스가 되면서 준영구 결번 대우는 사실상 종료되었다. 후쿠모토는 동료였던 야마다 히사시가 "7번과 (야마다의) 17번은 영구 결번으로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한 것을 언급하며, 자신과 야마다, 그리고 가토 히데지의 10번까지 세 등번호는 "지금이라도 돌려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내기도 했다.[24]
5. 1. 도루
신인 시절인 1969년 4월 12일 개막전(도에이 플라이어스 전)에서 나가이케 도쿠지의 대주자로 첫 출전하여 도루를 시도했으나, 미야자키 쇼지·스즈키 노리오 배터리에게 막혀 실패로 끝났다.[31] 다음 날인 4월 13일, 같은 팀과의 더블헤더 제2경기에서 프란시스 아그위리의 대주자로 다시 기용되었고, 사쿠라이 켄·타네모 시게유키 배터리를 상대로 프로 첫 도루를 성공시켰다.[31] 이 해에는 38경기에만 출전했지만, 프로 데뷔는 야마다나 가토보다 빨랐다.[32]2년차인 1970년부터 주전으로 자리 잡아 타율 .274를 기록했고, 시즌 최다인 75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생애 첫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듬해 1971년에도 67개의 도루로 2년 연속 도루왕에 올랐다. 1972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유일한 시즌 세 자릿수 도루이자, 당시 모리 윌스의 MLB 기록(104개)을 넘어서는 세계 신기록인 '''106도루'''를 달성했다.[1][2][35][36] 이 활약으로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함과 동시에, 사상 최초로 퍼시픽 리그 MVP와 도루왕을 동시에 석권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1977년 7월 6일 난카이 호크스전(니시노미야 구장) 4회에 2루 도루를 성공하며, 히로세 요시노리가 가지고 있던 통산 최다 도루 일본 기록(596개)을 경신했다.[37] 이후 1982년까지 13년 연속으로 도루왕 타이틀을 독점했다. 처음 도루왕을 차지한 이후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벤치에서 도루 지시 없이 자신의 판단으로 뛸 수 있는 그린라이트를 부여받았다.[38] 출루하면 "자동적으로 2루타와 같은 의미"를 가졌으며,[39] 가토 히데시는 "삼진만 당하지 않으면 어떤 형태로든 3루에서 생환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40] 1977년 일본 시리즈 제2전에서는 1회 볼넷 출루 후, 도루와 두 번의 내야 땅볼로 안타 없이 선취점을 올리기도 했는데, 후쿠모토는 이를 "우리가 공식전에서 해왔던 평상복 야구"라고 자평했다.[43]
1983년 6월 3일 세이부 라이온스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9회에 3루 도루를 성공시켜, 당시 루 브록이 보유하고 있던 MLB 통산 도루 기록을 넘어서는 '''통산 939도루''' 세계 신기록을 달성했다.[1] 후쿠모토는 본래 홈 구장인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기록을 세우고 싶어 했고 구단도 이를 원했지만,[44] 큰 점수 차로 지고 있던 경기 막판이라 뛸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상대 유격수 이시게 히로노리의 반복된 견제 커버에 "그만 욱해서" 뛰었다고 회고하며 "어딘가 기분 안 좋은 세계 기록이 되어 버렸다"고 술회했다.[44] 기록 달성 순간,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에서는 이례적으로 상대 팀 선수를 축하하는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이후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총리로부터 국민영예상 수상을 제안받았으나, "서서 오줌도 못 누게 된다"는 유명한 말과 함께 사양했다.[45][46] 훗날 인터뷰에서 이는 기자와의 잡담에서 나온 말이었으며,[5] 실제로는 오 사다하루와 같은 "야구인의 모범"이 될 자신이 없었고, 마작이나 흡연을 즐기는 자신의 생활 방식이 다른 수상자들에게 누가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45][5][47] 다만, 오사카 부지사상(현 감동 오사카 대상)은 수락하여 키시 마사시 당시 지사로부터 상장을 받았다. 또한 세계 기록 달성을 기념한 명구회 특례 가입도 사양하고, 같은 해 9월 1일 롯데 오리온스전에서 타무라 이사오로부터 중전 안타를 쳐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며 정식으로 명구회에 가입했다.
1983년 시즌 도루는 55개에 그쳐, 60개를 기록한 오이시 다이지로(긴테쓰)에게 13년 연속 도루왕 기록을 내주었다.[49] 후쿠모토는 기록 달성 전부터 힘들었고, 오이시가 자신과 같은 타입의 선수이자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제자였기에 "이제 못 뛰겠으니 (타이틀을) 너에게 줄게"라고 말했다고 한다.[49] 연속 기록에 연연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상대가 오이시가 아니었다면 "분명 14년 연속을 목표로 열심히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49]
1984년 8월 7일에는 통산 1000도루를 달성했고, 이후 기록을 '''1065개'''까지 늘렸다. 이는 2023년 시즌 종료 시점에도 NPB 역대 1위 기록이자 세계 2위 기록이다. 통산 115개의 3루타와 통산 299회의 도루 실패 역시 NPB 역대 1위 기록이다.[6][7] 1000도루 달성 이후에는 자신의 생일(11월 7일)에 맞춰 통산 1107도루를 개인적인 목표로 삼기도 했다.[50] 그의 통산 1065 도루 기록은 "'''세계의 후쿠모토'''[4]", "'''세계의 도루왕'''[5]"이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현역 말년인 1988년 시즌에는 도루 수가 크게 줄었는데, 이는 출루해도 벤치에서 "기다려" 사인이 나왔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 은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후쿠모토 본인이 밝힌 바 있다.[24] 마지막으로 출전한 1987년 올스타전에서는 도루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는데, 이에 대해 "나도 모르게 다리가 움직였다"고 말했다.
은퇴 4년 후인 1992년, 리키 헨더슨이 루 브록의 MLB 통산 도루 기록(938개) 경신에 임박하자, 후쿠모토는 기록 달성의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헨더슨은 후쿠모토가 시구자로 나선 6월 16일 경기에서 939번째 도루를 성공시키며 MLB 통산 도루 신기록을 세웠다. 후쿠모토는 헨더슨을 축하하며 미리 준비한 금빛 스파이크를 선물했고, 헨더슨은 기록 달성 당시의 2루 베이스를 후쿠모토에게 선물했다. 후쿠모토는 헨더슨의 신체 능력, 특히 도루와 귀루 시 첫발의 순발력을 "마치 벤 존슨이 스타트하는 것 같았다. 내 근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극찬했으며, 헨더슨 역시 후쿠모토를 "존경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헨더슨은 이듬해인 1993년에 후쿠모토가 보유하고 있던 세계 통산 도루 기록 1065개를 넘어섰다.[2][3]
5. 2. 타격
도루뿐만 아니라 타격에서도 뛰어난 선수였는데, 통산 2543 안타, 208 홈런, 178회의 맹타상[123], 7번의 3할 타율 기록 등에서 이를 증명한다. 8000타수 이상 기록한 선수 중 통산 타율 .291은 역대 4위에 해당한다.신인 시절에는 프로 투수들의 빠른 공에 밀려 타격 연습 때 3루 쪽으로 "맞고 도망가는" 듯한 타격을 반복했다. 감독 니시모토 유키오에게 "발이 빠르니 3루 쪽으로 굴리면 내야 안타가 된다"고 말하기도 했으나, 니시모토는 "그런 쉬운 연습만 하면 힘이 붙지 않는다", "아무리 몸이 작아도 제대로 휘둘러 치는 타격을 해야 한다. 오프 시즌 동안 배트를 제대로 휘두를 수 있는 몸을 만들어 오지 않으면 주전으로 쓸 수 없다", "급소에 맞으면 홈런이 된다는 것을 갖추지 않으면 프로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며 강하게 꾸짖었다고 한다[24][73]。1970년, 돈 브레이저가 "후쿠모토는 정말 아깝다. 저 발로 좀 더 짧은 땅볼을 치면 확실하게 수위 타자가 될 텐데"라고 언급한 기사를 보고 세이프티 번트를 유격수 쪽으로 굴리는 연습을 하자, 니시모토는 "그런 식으로 치면 너 대신 쇼가키나 토우긴을 쓰겠다"고 또다시 꾸짖었다[33]。
후쿠모토는 프로 입단 초기부터 960g~980g의 무거운 배트를 사용했다[124]。이후 난카이의 후지와라 미츠루가 사용하던 지름이 굵은 "츠치노코 배트"를 오쿠마(킨키 대학에서 후지와라의 선배)가 얻었고, 그중 하나를 모델로 미즈노에서 자신의 배트를 만들었다[124]。이 배트로 타격 연습을 하자 "쿵"하는 좋은 소리와 함께 강하고 빠른 타구가 나왔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후쿠모토는 "츠치노코 배트"로 제대로 휘둘러 치는 연습을 반복했다. 이 훈련 덕분에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장타력을 갖추게 되었고, 20년간 11번이나 시즌 두 자릿수 홈런(최다 21홈런)을 기록했다. 1972년에는 시즌 8개의 선두 타자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2007년 다카하시 요시노부가 경신하기 전까지 일본 프로 야구 타이 기록이었다. 통산 선두 타자 홈런 43개는 여전히 일본 기록이다(미일 통산 기록은 이치로가 경신). 이 타격 방식은 후대의 준족 타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와카마츠 츠토무(야쿠르트), 오이시 다이지로(긴테쓰) 등도 츠치노코 배트를 애용했다. 1976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투수 야마구치 타카시나 야마다 히사시도 후쿠모토의 배트를 사용해 안타를 쳤는데, 후쿠모토는 저서에서 이 배트라면 "투수라도 공을 맞히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적었다[124]。츠치노코 배트의 무게는 처음에는 1200g이었고, 10년 정도 지나 1080g으로 안정되었다고 한다[124]。일본 야구 전당 박물관에 전시된 후쿠모토의 배트는 다른 타자들의 배트와 비교해 굵고, 짧고, 무겁다[125]。
도루 시에는 투수의 버릇을 파악하는 데 집중했지만, 타격은 자연스럽게 임했다고 한다. 오카자키 미츠요시(『Number』 초대 편집장)에게 "(버릇 파악 연구를) 타격에도 활용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타격에서는 잘 안 됐다. 버릇을 파악해서 구종 등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긴장해서 폼이 무너졌다"고 답했다[73]。
빠른 발과 정확한 타격을 살려 런닝 홈런도 4번 기록했는데,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대 3위 타이 기록이다[126]。
기록 | 내용 | 비고 |
---|---|---|
통산 안타 | 2,543개 | |
통산 홈런 | 208개 | |
통산 타율 | .291 | 8,000타수 이상 역대 4위 |
통산 2루타 | 449개 | 퍼시픽 리그 역대 1위 |
통산 3루타 | 115개 | NPB 역대 1위 |
통산 2루타+3루타 | 564개 | 역대 1위 |
맹타상 | 178회 | |
3할 타율 시즌 | 7회 | |
최다 안타 | 4회 | 당시 퍼시픽 리그 기록 |
연속 경기 안타 | 30경기 (1977년) | 역대 4위 타이 |
통산 선두 타자 홈런 | 43개 | NPB 역대 1위 |
시즌 선두 타자 홈런 | 8개 (1972년) | 당시 NPB 타이 기록 |
런닝 홈런 | 4회 | 역대 3위 타이 |
통산 4번의 최다 안타는 1998년 이치로에게 추월당하기 전까지 퍼시픽 리그 기록이었다. 2011년 기준으로 에노모토 키하치, 부머 웰스와 함께 퍼시픽 리그 역대 2위 타이 기록이다. 또한, 1977년에는 프로 야구 역대 4위 타이, 퍼시픽 리그 역대 3위인 30경기 연속 안타를 달성했다.
1985년에 통산 3루타 기록을, 현역 마지막 해인 1988년에 통산 2루타 기록을 경신하여 한때 도루와 함께 3개의 일본 기록을 보유했다. 이 중 2루타 기록은 2005년 주니치의 타츠나미 카즈요시에게 깨졌지만, 2017년 현재도 퍼시픽 리그 기록이다. 타츠나미는 기록 경신 당시 "후쿠모토 씨의 발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 이 기록 갱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일반적인 선수라면 2루타에 그칠 타구를 3루타로 만드는 후쿠모토의 뛰어난 주루 능력을 지적한 것이다. 통산 2루타와 3루타를 합한 수(564)는 역대 1위이다. 후쿠모토는 "스릴과 도전이라는 점에서 타자로서 3루타가 가장 재미있다"고 말했다[127][128]。2009년 저서에서는 자신이 현역 시절 좁은 구장에서 기록을 세운 것과 비교하며, 구장이 넓어진 현대 야구 선수들이 3루타를 노리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129]。
200개 이상의 홈런도 기록했지만, 후쿠모토 자신은 "1번 타자의 역할은 출루이며, 홈런을 노리는 것은 이상하다. 풀카운트에 몰려서 마음대로 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은데 홈런을 노리는 것은 역시 이상하다"고 말하며, 홈런을 노리는 1번 타자가 많은 헤이세이 시대 이후의 프로 야구 선수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130]。다만 자신의 홈런 기록에 대해서는, 작은 체구의 자신이 208개나 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자랑하고 싶은" 숫자라고 말했다[131]。통산 200홈런 이상을 기록한 사실은 노무라 가츠야로부터 "네가!?"라며 놀라움을 사는 등, 본인의 이미지와는 다른 것으로 프로 야구 관계자들에게도 인식되었다[139]。
타격 3관왕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었다. 1978년에는 시즌 후반까지 타율 선두를 달리며 수위 타자 등극 가능성이 있었지만, 막판에 규정 타석을 채운 사사키 쿄스케(긴테쓰)가 추월하여 타이틀을 놓쳤다[132]。후쿠모토는 사사키에 대해 "경찰차처럼 나타났다"고 표현했다[132]。
5. 3. 수비
준족과 판단력은 수비에서도 발휘되었다. 사회인 시절부터 팔꿈치 부상으로 송구에 어려움이 있었으나[73],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했다. 통산 수비 기회 5272, 통산 자살 수 5102는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 1974년 7월 22일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제2차전에서는 한신의 다부치 고이치가 친 홈런성 타구를 펜스 위까지 기어올라 잡아내기도 했다. 이를 본 요미우리의 나가시마 시게오는 "마치 원숭이 같다"고 평했다[133]. 그러나 후쿠모토 본인은 "기본에 따라 공의 낙하 지점으로 일직선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어떤 외야수라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133]. 7년 후, 후쿠모토가 수비 연습을 도왔던 야마모리 마사후미가 공식전(9월 16일, 롯데전)에서 비슷한 플레이를 선보였을 때, 중견수로 수비하던 후쿠모토는 자신의 플레이를 떠올리며 "해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133]. 같은 올스타전 경기에서는 멋진 수비와 더불어 홈런도 기록하며 MVP를 수상했다.골든 글러브상을 역대 최다인 12회 수상하며 '외야 수비의 명수'로 불렸지만, 신인 시절 캠프에서는 수비 연습 중 실수를 연발하며 프로의 벽을 실감하기도 했다. (마쓰시타 전기 시절까지는 발이 빨라 제멋대로 판단하여 달려가도 포구할 수 있었지만, 프로는 달랐다고 한다)[135]. 당시 감독 니시모토 유키오는 외야 수비 및 타격 코치였던 나카타 마사히로에게 후쿠모토 전담 노커가 되어 "살아있는 타구를 익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32]. 후쿠모토는 빠르면서도 "갑자기 늘어나거나 꺾이는" 타구의 펑고를 매일 200개 가까이 받으며 낙하 지점을 예측하고 그곳까지 직선으로 달리는 능력을 길렀다[134][135]. 나카타 코치는 상대 팀 타격 연습을 관찰하여 타자별 타구 경향을 파악하는 것도 의무화했다[135]. 이러한 지도와 연습, 경험 축적을 통해 후쿠모토는 외야 수비의 명수로 성장했다[135]. 다른 구단 야수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비 범위가 넓었다", "중견수로 쳐도 안타가 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136].
어깨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1976년에는 중견수에서 2루 송구로 4차례 기록)고 하지만[137], 프로 입단 후 약 10년째 되던 해 캠프에서 무리한 송구로 왼쪽 팔꿈치에 박리성 골연골염(유리 연골)이 발생하여 송구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는 유격수 오하시 미노루의 컷 플레이로 보완했다[138]. 당시 한큐는 홈 송구보다 컷 플레이를 중시했다고 한다[137]. 현역 말년(1984년 이후)에는 좌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강견의 척도인 보살 수는 통산 109개(2293경기)로, 다른 강견 중견수들에 비해 1보살당 경기 수는 다소 부족하다(후쿠모토 21.0경기당 1보살, 야마모토 고지 14.8경기당 1보살).
현역 말년에는 좌익수를 맡았지만, 고교·사회인·프로 시절 내내 중견수만 맡았기 때문에, 중견수보다 펜스가 가까운 좌익수 수비에 어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도 "다른 포지션에 가면 못한다"며 중견수 외 포지션에는 적응하기 어려웠음을 인정했다[139].
후쿠모토는 오릭스에서 자신 이후에도 야마모리 마사후미, 모토니시 아쓰히로, 다구치 소, 이치로와 같은 뛰어난 외야수들이 배출되었고, 수비 연습의 기초가 계승되고 있어 "선수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24].
6. 논란 및 비판
- 1976년 일본 시리즈 3차전(10월 27일)에서 소속팀 한큐 브레이브스가 요미우리에게 3연승을 거둔 후, "긴테쓰도 롯데도 우리랑 3번 하면 한 번은 이길 텐데"라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상대 팀을 얕보는 듯한 인상을 주어 거만하다는 비판을 받았다.[168] 공교롭게도 이후 한큐는 요미우리에게 3연패를 당하며 역전으로 일본 시리즈 우승을 놓칠 뻔했으나, 마지막 7차전에서 승리하며 우승했다. 훗날 후쿠모토는 이 발언에 대해 "말이 부족해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당시 롯데는 강했고, 투수진에는 나리타 씨 같은 좋은 선수들이 있었다. 그때까지 요미우리에게 한 번도 이기지 못했는데 '약하다'고 말할 리가 없다"고 해명했다.[168]
- 1992년 5월 27일, 선TV 박스석에서 중계한 한신 고시엔 구장의 한신 타이거스 대 다이요 웨일스 경기 해설 중, 투수전 양상으로 0의 행진이 이어지며 연장전에 돌입하자 캐스터 쿠스노키 아츠오가 "후쿠모토 씨, 점수가 안 나네요"라고 묻자 "타코야키 같네"라고 답했다. 이후 15회말 한신이 1점을 내며 끝내기 승리를 거두자 "타코야키에 이쑤시개가 꽂혔네"라고 말했다.[169] 쿠스노키는 이 일을 '타코야키 사건'이라 부르며 "후쿠모토 씨의 솔직함이 더해져 (방송이) 재미있어졌다"고 회고했다.[169]
- 2008년 7월 29일, ABC 후레쉬업 베이스볼에서 중계한 진구 구장의 야쿠르트 대 한신 경기 해설 중에는 5회 종료 후 악천후로 경기가 중단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당시 2층 임시 방송석에서 중계하고 있었는데, 들이치는 비를 피해 자리를 뜨려는 방송 디렉터에게 캐스터 쿠스노키와 함께 "너 혼자 도망가지 마!"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또한 쿠스노키가 다른 구장 경기 결과를 전하는 동안 "천둥이다, 천둥이다!"라고 외치거나, 쿠스노키가 "쓸데없는 업무 연락은 그만하십시오"라고 제지하자 "바보, 그래도 옷이 젖을 거 아냐"라고 응수했다. 방송석 주변에 관객들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도 "춥네, 이런 일 없었으면 마작이나 하고 있을 텐데"라고 말하거나, 콜드 게임으로 한신이 승리하자 승리 투수가 된 라이언 보글슨을 향해 "횡재한 승리네"라고 평가하는 등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다. 쿠스노키는 당시 상황을 "즉흥 만담을 하는 상황"이었다고 표현했다.
7. 수상 및 기록
후쿠모토 유타카는 현역 시절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20년간 활약한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로, 통산 1065 도루는 1993년 MLB의 리키 헨더슨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세계 기록이었다. 이 때문에 "'''세계의 후쿠모토'''"[4], "'''세계의 도루왕'''"[5]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023년 시즌 종료 기준 NPB 기록, 세계 2위)
1970년, 프로 2년차부터 주전으로 자리 잡아 시즌 최다인 75도루를 기록하며 첫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고, 이후 1982년까지 13년 연속 도루왕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특히 1972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유일한 시즌 세 자릿수 도루이자 당시 세계 신기록인 '''106도루'''[35]를 달성하며[36]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사상 최초로 퍼시픽 리그 MVP와 도루왕을 동시에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1][2] 이는 도루 부문 리그 선두 선수가 MVP를 수상한 최초의 사례였다.
1977년 7월 6일, 히로세 요시노리가 보유하고 있던 통산 최다 도루 일본 기록(596개)을 경신했다.[37] 1983년 6월 3일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는 루 브록의 메이저 리그 기록을 넘어서는 통산 939번째 도루를 성공시키며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1][44] 기록 달성 순간, 적지인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에서는 이례적으로 후쿠모토를 축하하는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이 공로로 당시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로부터 국민영예상 수상이 제안되었으나, 후쿠모토는 "서서 오줌도 못 누게 된다"[45][46]는 기자와의 잡담에서 나온 농담이었다고 밝히며[5], 실제로는 오 사다하루와 같은 '야구인의 모범'이 될 자신이 없고 마작이나 흡연 등 개인적인 기호를 즐기는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상이라고 생각하여 정중히 사양했다.[45][5][47] 대신 '''오사카부 지사상'''(현 감동 오사카 대상)은 수상했다.[48] 또한, 세계 기록 달성을 기념한 명구회 특례 가입도 사양하고, 같은 해 9월 1일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며 정식으로 명구회에 가입했다.
1984년 8월 7일에는 통산 1000도루를 달성했고, 최종적으로 통산 도루 기록을 1065개까지 늘렸다. 그의 기록은 은퇴 4년 후인 1992년 리키 헨더슨에 의해 깨졌는데, 후쿠모토는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헨더슨의 기록 경신 순간을 지켜보며 금색 스파이크를 선물하는 등 축하를 보냈다. 헨더슨 역시 후쿠모토를 "존경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후쿠모토는 도루 외에도 통산 115 3루타, 통산 299 도루사 부문에서 NPB 역대 1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6][7], 다이아몬드 글러브상(현 골든 글러브상)을 12회 수상(역대 최다)하는 등[8] 뛰어난 수비력도 겸비했다. 또한 14년 연속 시즌 50도루 이상이라는 대기록도 세웠다.[9] 2002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7. 1. 타이틀
후쿠모토 유타카가 획득한 주요 타이틀 및 표창은 다음과 같다.타이틀 | 횟수 | 수상 연도 |
---|---|---|
도루왕 | 13회 | 1970년 ~ 1982년 (13년 연속, 최다 기록)[1] |
최다 안타 | 4회 | 1973년, 1974년, 1977년, 1978년 (당시 연맹 표창 없음) |
퍼시픽 리그 MVP | 1회 | 1972년[1][2] |
베스트 나인 | 10회 | 1972년 ~ 1974년, 1976년 ~ 1982년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 12회 | 1972년 ~ 1983년 |
일본 시리즈 MVP | 1회 | 1976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 2회 | 1977년, 1984년 |
일본 시리즈 타격상 | 1회 | 1976년 |
일본 시리즈 기능상 | 1회 | 1975년 |
올스타전 MVP | 3회 | 1973년 2차전, 1974년 2차전, 1982년 1차전 |
- 1972년에는 도루왕과 퍼시픽 리그 MVP를 동시에 석권했는데, 이는 도루 부문에서 리그를 이끈 최초의 일본인 MVP 기록이다.[1][2]
- 정규 시즌, 올스타전, 일본 시리즈에서 모두 MVP를 수상한 기록은 가와카미 데쓰하루, 오시타 히로시에 이어 프로 야구 역대 3번째이다(후에 마쓰이 히데키도 달성).
- 1983년, 통산 도루 세계 기록 경신의 공로로 국민영예상 수상이 결정되었으나 본인이 극구 사양하며 거절했다.[1][2][3]
- 2002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7. 2. 수상
1972년 시즌 106도루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퍼시픽 리그 MVP와 도루왕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했다. 이는 도루 부문 리그 선두 선수가 MVP를 수상한 최초의 사례였다.[1][2]1983년, 루 브록의 기록을 넘어 통산 939도루를 달성하며 세계 기록을 세웠다.[1][2][3] 이 공로로 당시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로부터 국민영예상 수상이 제안되었으나, 후쿠모토는 이를 사양했다. 그는 "서서 오줌도 못 누게 된다"[45][46]는 기자와의 잡담에서 나온 농담이었다고 밝히며[5], 실제로는 오 사다하루와 같은 '야구인의 모범'이 될 자신이 없고, 마작이나 흡연 등 개인적인 기호를 즐기는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상이라고 생각하여 거절했다고 설명했다.[45][5][47] 대신 '''오사카부 지사상'''(현 감동 오사카 대상)은 수상했다.[48] 또한 세계 기록 달성을 기념한 명구회 특례 가입도 사양하고, 같은 해 9월 1일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며 정식으로 명구회에 가입했다.
2002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주요 수상 경력은 다음과 같다.
상 이름 | 횟수 | 수상 연도 및 비고 |
---|---|---|
퍼시픽 리그 MVP | 1회 | 1972년 |
도루왕 | 13회 | 1970년 ~ 1982년 (13년 연속) |
최다 안타 | 4회 | 1973년, 1974년, 1977년, 1978년 (당시는 타이틀이 아니었음. 1994년부터 공식 타이틀로 제정) |
베스트 나인 (외야수 부문) | 10회 | 1972년 ~ 1974년, 1976년 ~ 1982년 (역대 2위 타이, 퍼시픽 리그 2위)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외야수 부문) | 12회 | 1972년 ~ 1983년 (역대 최다 수상, 12년 연속 최장 기록)[8] |
일본 시리즈 MVP | 1회 | 1976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 2회 | 1977년, 1984년 |
일본 시리즈 타격상 | 1회 | 1976년 |
일본 시리즈 기능상 | 1회 | 1975년 |
올스타전 MVP | 3회 | 1973년 제2차전, 1974년 제2차전, 1982년 제1차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 - | 2002년 (경기자 표창) |
효고현 스포츠 우수 선수 특별상 | 1회 | 1988년 (통산 1065도루 기념)[170] |
7. 3. 개인 기록
- 도루왕: 13회(1970년 ~ 1982년)
- 최다 안타(당시는 타이틀이 아님): 4회(1973년, 1974년, 1977년, 1978년) ※1994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됨.
- MVP: 1회(1972년)
- 베스트 나인: 10회(1972년 ~ 1974년, 1976년 ~ 1982년)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12회(1972년 ~ 1983년)
- 일본 시리즈 MVP: 1회(1976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2회(1977년, 1984년)
- 일본 시리즈 타격상: 1회(1976년)
- 일본 시리즈 기능상: 1회(1975년)
- 올스타전 MVP: 3회(1973년 2차전, 1974년 2차전, 1982년 1차전)
:※정규 시즌, 올스타전, 일본 시리즈에서의 MVP 석권은 가와카미 데쓰하루, 오시타 히로시에 뒤를 이은 프로 야구 역대 3번째의 기록(후에 마쓰이 히데키도 달성).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2002년)
'''통산 성적'''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 실패 | 볼넷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69 | 한큐 | 38 | 41 | 39 | 8 | 11 | 3 | 0 | 2 | 20 | 4 | 4 | 1 | 2 | 0 | 6 | 0 | .282 | .317 | .513 | .830 |
1970 | 127 | 489 | 423 | 92 | 116 | 23 | 3 | 8 | 169 | 41 | 75 | 15 | 55 | 5 | 71 | 4 | .274 | .362 | .400 | .762 | |
1971 | 117 | 481 | 426 | 82 | 118 | 18 | 5 | 10 | 176 | 45 | 67 | 14 | 50 | 1 | 49 | 2 | .277 | .351 | .413 | .764 | |
1972 | 122 | 542 | 472 | 99 | 142 | 25 | 6 | 14 | 221 | 40 | 106 (NPB 기록) | 25 | 62 | 3 | 69 | 2 | .301 | .384 | .468 | .852 | |
1973 | 123 | 566 | 497 | 100 | 152 | 29 | 10 | 13 | 240 | 54 | 95 | 16 | 65 | 2 | 56 | 3 | .306 | .387 | .483 | .870 | |
1974 | 129 | 539 | 477 | 84 | 156 | 19 | 7 | 8 | 213 | 52 | 94 | 23 | 58 | 2 | 57 | 2 | .327 | .401 | .447 | .848 | |
1975 | 130 | 549 | 491 | 79 | 127 | 26 | 4 | 10 | 191 | 51 | 63 | 12 | 50 | 4 | 74 | 3 | .259 | .330 | .389 | .719 | |
1976 | 129 | 567 | 489 | 88 | 138 | 23 | 9 | 8 | 203 | 46 | 62 | 17 | 73 | 2 | 66 | 8 | .282 | .376 | .415 | .791 | |
1977 | 130 | 597 | 541 | 89 | 165 | 21 | 9 | 16 | 252 | 54 | 61 | 13 | 49 | 4 | 74 | 6 | .305 | .366 | .466 | .832 | |
1978 | 130 | 595 | 526 | 107 | 171 | 35 | 10 | 8 | 250 | 34 | 70 | 21 | 60 | 5 | 65 | 4 | .325 | .399* | .475 | .874 | |
1979 | 128 | 587 | 493 | 101 | 142 | 27 | 9 | 17 | 238 | 67 | 60 | 24 | 79 | 5 | 63 | 2 | .288 | .390 | .483 | .873 | |
1980 | 128 | 603 | 517 | 112 | 166 | 29 | 6 | 21 | 270 | 58 | 54 | 20 | 78 | 1 | 64 | 3 | .321 | .409* | .522 | .931 | |
1981 | 130 | 584 | 495 | 90 | 142 | 22 | 7 | 14 | 220 | 48 | 54 | 15 | 80 | 1 | 65 | 3 | .287 | .386 | .444 | .830 | |
1982 | 127 | 575 | 476 | 97 | 144 | 31 | 7 | 15 | 234 | 56 | 54 | 20 | 88 | 2 | 46 | 4 | .303 | .413 | .492 | .905 | |
1983 | 130 | 587 | 493 | 89 | 141 | 26 | 7 | 10 | 211 | 59 | 55 | 20 | 85 | 1 | 40 | 5 | .286 | .391 | .428 | .819 | |
1984 | 130 | 585 | 488 | 93 | 126 | 22 | 2 | 9 | 179 | 41 | 36 | 17 | 85 | 2 | 41 | 3 | .258 | .369 | .367 | .736 | |
1985 | 130 | 531 | 425 | 95 | 122 | 15 | 7 | 11 | 184 | 51 | 23 | 10 | 95 | 0 | 40 | 5 | .287 | .412 | .433 | .845 | |
1986 | 130 | 520 | 454 | 75 | 120 | 18 | 2 | 8 | 166 | 29 | 23 | 12 | 55 | 3 | 55 | 2 | .264 | .346 | .366 | .712 | |
1987 | 101 | 386 | 349 | 53 | 100 | 25 | 3 | 5 | 146 | 33 | 6 | 3 | 33 | 0 | 35 | 0 | .287 | .346 | .418 | .764 | |
1988 | 92 | 206 | 174 | 23 | 44 | 12 | 2 | 1 | 63 | 21 | 3 | 1 | 32 | 0 | 18 | 4 | .253 | .369 | .362 | .731 | |
통산:20년 | 2401 | 10130 | 8745 | 1656 | 2543 | 449 | 115 (NPB 기록) | 208 | 3846 | 884 | 1065 (NPB 기록) | 299 (NPB 기록) | 1234 | 43 | 1054 | 65 | .291 | .379 | .440 | .819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NPB 기록)'''은 NPB 역대 최고 기록을 의미함.
- NPB에서는 1984년까지 희생 플라이를 고려하지 않고 출루율을 계산했기 때문에, 당시 계산 방법으로는 리그 1위가 아니었던 1978년과 1980년의 출루율 옆에 * 표시를 함 (현재 계산 방법으로는 리그 1위임).
'''첫 기록'''
- 첫 출장: 1969년 4월 12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1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8회말 나가이케 도쿠지의 대주자로 출장
- 첫 도루: 1969년 4월 13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3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8회말 2루 안착(투수: 사쿠라이 겐, 포수: 다네모 마사유키)
- 첫 선발 출장: 1969년 4월 20일, 대 난카이 호크스 3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1번·중견수로서 선발 출장
- 첫 안타: 상동, 5회말에 이즈미 요시로로부터 우익 선상 2루타
- 첫 홈런·첫 타점: 1969년 10월 9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25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6회말에 모리야스 도시아키로부터 2점 홈런
'''주요 기록'''
- 450 도루: 1975년 5월 14일, 대 태평양 클럽 라이온즈 전기 9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8회말 2루 도루(투수: 가토 하지메, 포수: 구스기 테츠루)
- 500 도루: 1975년 9월 21일, 대 킨테츠 버팔로즈 후기 10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7회말 2루 도루(투수: 오타 코지, 포수: 아리타 슈조) ※역대 2번째
- 550 도루: 1976년 8월 12일, 대 난카이 호크스 후기 5차전(오사카 스타디움), 1회초 2루 도루(투수: 에가와 유타카, 포수: 노무라 가쓰야) ※역대 2번째
- 1000 안타: 1977년 5월 15일, 대 난카이 호크스 전기 8차전(오사카 스타디움), 9회초 모리구치 마스미쓰로부터 좌전 적시타 ※역대 100번째
- 600 도루: 1977년 7월 19일, 대 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즈 후기 1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3회말 2루 도루(투수: 고가 마사아키, 포수: 와카나 요시하루) ※역대 최초
- 1000경기 출장: 1977년 8월 5일, 대 킨테츠 버팔로즈 후기 4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1번·중견수로 선발 출장 ※역대 192번째(오하시 유타카와 동일에 달성)
- 650 도루: 1978년 6월 7일, 대 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즈 전기 10차전(니시쿄고쿠 구장), 1회말 2루 도루(투수: 야마시타 리쓰오, 포수: 와카나 요시하루) ※역대 최초
- 700 도루: 1979년 4월 10일, 대 세이부 라이온즈 전기 1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2회말 2루 도루(투수: 고자와 겐지, 포수: 노무라 가쓰야) ※역대 최초
- 100 홈런: 1979년 4월 22일, 대 닛폰햄 파이터즈 전기 2차전(고치 시 야구장), 3회말 스기야마 지타카로부터 좌월 동점 솔로 ※역대 100번째
- 750 도루: 1979년 9월 11일, 대 난카이 호크스 후기 9차전(오사카 스타디움), 3회초 2루 도루(투수: 스기타 히사오, 포수: 이토 이사오) ※역대 최초
- 1500 안타: 1980년 6월 6일, 대 닛폰햄 파이터즈 전기 10차전(고라쿠엔 구장), 6회초 다카하시 나오키로부터 ※역대 38번째
- 800 도루: 1980년 9월 13일, 대 킨테츠 버팔로즈 후기 9차전(닛세이 구장), 1회초 3루 도루(투수: 이모토 다카시, 포수: 나시다 마사타카) ※역대 최초
- 1500경기 출장: 1981년 7월 11일, 대 세이부 라이온즈 후기 1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1번·중견수로 선발 출장 ※역대 69번째
- 850 도루: 1981년 8월 26일, 대 세이부 라이온즈 후기 7차전(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9회초 3루 도루(투수: 고자와 겐지, 포수: 야마나카 시게노부) ※역대 최초
- 300 2루타: 1981년 9월 21일, 대 난카이 호크스 후기 12차전(오사카 스타디움), 3회초 야마우치 신이치로부터 우익선 2루타 ※역대 19번째
- 150 홈런: 1982년 4월 16일, 대 롯데 오리온즈 전기 1차전(가와사키 구장), 1회초 미즈타니 노리히로로부터 선두 타자 홈런 ※역대 63번째
- 900 도루: 1982년 8월 6일, 대 난카이 호크스 후기 2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3회말 2루 도루(투수: 이노우에 유지, 포수: 이와키 테쓰루) ※역대 최초
- 3000 루타: 1983년 6월 25일, 대 세이부 라이온즈 13차전(시마네현립 하마야마 공원 야구장), 8회말 마쓰누마 마사유키로부터 좌익선 2루타 ※역대 22번째
- 350 2루타: 1983년 7월 3일, 대 닛폰햄 파이터즈 13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1회말 다카하시 가즈미로부터 좌전 2루타 ※역대 11번째
- 950 도루: 1983년 8월 2일, 대 킨테츠 버팔로즈 15차전(헤이와다이 구장), 2회초 2루 도루(투수: 스미토모 가즈야, 포수: 나시다 마사타카) ※역대 최초
- 2000 안타: 1983년 9월 1일, 대 롯데 오리온즈 21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4회말 다무라 이사오로부터 중전 적시타 ※역대 17번째
- 1000 도루: 1984년 8월 7일, 대 난카이 호크스 18차전(오사카 스타디움), 9회초 2루 도루(투수: 아오이 가나메, 포수: 요시다 히로유키) ※역대 최초
- 2000경기 출장: 1985년 6월 12일, 대 닛폰햄 파이터즈 11차전(고라쿠엔 구장), 1번·중견수로 선발 출장 ※역대 21번째
- 3500 루타: 1986년 5월 9일, 대 난카이 호크스 5차전(오사카 스타디움), 9회초 다케구치 아키노리로부터 우중간 안타 ※역대 14번째
- 1050 도루: 1986년 6월 7일, 대 닛폰햄 파이터즈 9차전(고라쿠엔 구장), 3회초 2루 도루(투수: 가나자와 지오, 포수: 다무라 후지오) ※역대 최초
- 400 2루타: 1986년 6월 12일, 대 세이부 라이온즈 10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4회말 오노 가즈유키로부터 우익선 2루타 ※역대 8번째
- 200 홈런: 1986년 8월 17일, 대 킨테츠 버팔로즈 17차전(후지이데라 구장), 1회초 구보 야스오로부터 우월 선두 타자 홈런 ※역대 50번째
- 1000 삼진: 1986년 10월 10일, 대 킨테츠 버팔로즈 26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2회말 타니 히로아키로부터 ※역대 13번째
- 2500 안타: 1988년 4월 8일, 대 킨테츠 버팔로즈 1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5회말 아와노 히데유키로부터 우중간 3루타 ※역대 5번째
'''일본 기록'''
- 통산 1065 도루
- 통산 115 3루타
- 통산 299 도루자
- 통산 외야수 자살: 5102
- 통산 외야수 수비 기회: 5272
- 통산 첫 회 선두 타자 홈런: 43개 (1회초 24개, 1회말 19개) ※1회초 24개는 일본 타이 기록, 1회말 19개는 퍼시픽 리그 기록
- 시즌 20 2루타 이상: 14회 (1970년, 1972년, 1973년, 1975년 - 1984년, 1987년) ※타이 기록
- 시즌 3루타 리그 1위: 8회 (1971년, 1973년, 1974년, 1977년 - 1979년, 1982년, 1983년)
- 시즌 50 도루 이상: 14회 (1970년 - 1983년)
- 시즌 도루: 106 (1972년)
- 1경기 3 도루사 (1980년 6월 19일) ※타이 기록
- 13년 연속 도루왕 (1970년 - 1982년) ※획득 횟수 13회도 일본 기록
- 12년 연속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1972년 - 1983년) ※수상 횟수 12회도 일본 기록
- 14년 연속 시즌 50 도루 이상 (1970년 - 1983년)
- 3년 연속 시즌 3루타 리그 1위 (1977년 - 1979년) ※타이 기록
- 2년 이상 연속 최다 3루타를 3번 ※역사상 유일
- 2년 이상 연속 최다 사구를 2번 ※역사상 유일
'''퍼시픽 리그 기록'''
- 통산 1656 득점 (1969년 - 1988년)
- 통산 449 2루타 (1969년 - 1988년)
- 시즌 득점 리그 1위: 10회 (1972년 - 1980년, 1982년)
- 시즌 사구 리그 1위: 6회 (1976년, 1978년 - 1980년, 1982년, 1983년) ※1980년은 야마자키 히로유키, 1983년은 몬다 히로미쓰와 동수. 다른 선수와 동수 리그 최다 사구 2회는 프로야구 사상 최다
- 시즌 100 득점 이상: 4회 (1973년, 1978년 - 1980년)
- 시즌 100 안타 이상: 18회 (1970년 - 1987년) ※타이 기록
- 시즌 전 경기 출장: 8회 (1975년, 1977년, 1978년, 1981년, 1983년 - 1986년) ※타이 기록
- 시즌 첫 회 선두 타자 홈런: 8개 (1972년) ※타이 기록
- 1경기 5 도루 (1972년 5월 3일)
- 17년 연속 규정 타석 달성 (1970년 - 1986년) ※타이 기록
- 3년 연속 시즌 100 득점 이상 (1978년 - 1980년) ※타이 기록
- 18년 연속 시즌 100 안타 이상 (1970년 - 1987년)
- 9년 연속 시즌 득점 리그 1위 (1972년 - 1980년)
- 3년 연속 시즌 사구 리그 1위 (1978년 - 1980년) ※타이 기록
'''그 외의 기록'''
- 최다 안타 (당시 연맹 표창 없음): 4회 (1973년, 1974년, 1977년, 1978년) ※1994년부터 표창
- 통산 맹타상: 178회 ※역대 5위
- 통산 도루 성공률: .781 (1065 도루 299 도루사) ※300 도루 이상에서는 역대 4위
- 사이클 안타: 1회 (1981년 5월 21일, 대 세이부 라이온즈전, 세이부 구장) ※역대 34번째
- 30경기 연속 안타 (1977년 5월 18일 - 7월 10일)
- 2경기 연속 첫 회 선두 타자 홈런 (1980년 8월 9일 - 8월 10일)
- 동일 구장에서 1000 안타 (니시노미야 구장)
- 일본 시리즈 통산 도루: 14 (1969년, 1971년, 1972년, 1975년 - 1978년, 1984년) ※역대 1위
- 일본 시리즈 3경기 연속 도루 ※시리즈 타이 기록
- 올스타전 출장: 17회 (1970년, 1972년 - 1987년)
- 올스타전 통산 도루:
8. 등번호
- '''40''' (1969년 ~ 1971년)
- '''7''' (1972년 ~ 1991년)
- '''87''' (1998년 ~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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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合×福本豊対談】阪急から指名も会社は猛反対 球団との面会は2週間後「ステーキで負け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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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阪急・福本豊氏 ドラフト指名を同僚のスポーツ紙で知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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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ゴネてアップ!?】福本豊の契約金と年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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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輪の夢バトンパス 東京大会選手が児童に伝授 兵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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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年からの手紙】男子400リレー代表・浅井浄さん 一番大切なのは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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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プロ野球】ヘッドスライディング禁止に反対!3度の盗塁王高橋慶彦が物申す!【高橋慶彦】【カー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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シロウトには分からない世界の盗塁王!福本豊の凄さ【高橋慶彦】【福本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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よしひこさーん頑張っ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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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永浩美は「世界の盗塁王」福本豊のバッグを見て驚愕した「スパイク、こんなに持ってるんです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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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率.143でMVP 鷹・甲斐が盗塁を刺し続け、多くの記録が刻まれた日本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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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ソフトバンク】12試合連続盗塁達成の周東佑京は本当のプロ…福本豊氏の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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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本豊 「盗塁1」に抑えられた屈辱の日本シリーズを語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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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本豊氏「レベルを上げさせてくれた」野村氏悼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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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の盗塁王”福本豊さん、クイック導入のノムさんと切磋琢磨…野村克也さん死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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パ・リーグ歴代No.1遊撃手はロッテ・小坂、二塁手は……/伊原春樹コラ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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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坂本 2発&179度目猛打賞 東京ドームで374日ぶり本塁打「最高の結果になって良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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滅多に出ないランニング本塁打、阪神上本が今季初、現役最多は松井稼頭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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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本豊氏「今、現役やってたら簡単にタイトル獲れそうや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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レジェンドに聞け!第18回 福本豊「いまは投手がロクにけん制し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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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ボクの思い出STUDIUM】藤井寺&日生球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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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はっきり言って絶対無理】国民栄誉賞 を辞退した世界の 盗塁王 福本豊 < 日本 プロ野球 名球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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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熊がこの忠告を口にしたのは、『阪急ブレーブス黄金の歴史―1936→1988』の山田との対談では「試合で死球を受けたとき」、『阪急ブレーブス 光を超えた影法師』では「フリー打撃の打球を左足に当てた」ときだと記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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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本が1973年シーズン中の復帰から右肩脱臼する前の1986年まで全試合に出場していた場合1769試合となり、2018年シーズン終了時点で歴代3位に相当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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話の肖像画 「世界の盗塁王」元プロ野球選手・福本豊(73)(16)世界タイ記録盗塁予告に「申し訳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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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年シーズン終了時点で、張本勲、野村克也、王貞治、門田博光、衣笠祥雄、福本、金本知憲、立浪和義、長嶋茂雄、土井正博の10人。なお、メジャーリーグベースボールでプレーしたイチロー、松井秀喜、松井稼頭央の3名は含めないものと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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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塁走塁ヘッスラより駆け抜けが速い?」を福本豊氏が解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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関西人独特の擬音語をまとめた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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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Cでも大注目、トレンド常連「加古川の人」って? 加古川市「大舞台を機に…光栄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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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本豊]宝塚歌劇に目からウロコ:本紙評論家リレーコラム:コラム:スポーツ報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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柚希礼音がMVP!宝塚大運動会2大会ぶり星組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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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笑いワイドショー マルコポロリ パ・リーグ残酷物語2 (2014年4月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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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Tレゾナント(gooテレビ番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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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プロ野球チームをつくろう!ONLINE 2、7月31日に5周年記念アップデートを実施!福本豊さんのサインボールなどが当たるキャンペーン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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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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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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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本豊さん、24個で盗塁王に「笑いますね」「僕、1カ月でしてますよ」 自身は122試合で106盗塁
https://www.sponichi[...]
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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鎮、2014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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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福本さんの大予言を生かした「累積実況」ABC・楠淳生アナの野球実況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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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ポーツ優秀選手特別賞 受賞者一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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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福本豊氏、ABCテレビ「おはよう朝日土曜日です」レギュラー出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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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ポーツ報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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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2011년 5월 7일, 호토모토 필드 고베에서 열린 오릭스 버펄로스 vs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는 야마다, 가토 히데지와 함께 한큐 시대를 재현한 유니폼 차림으로 등장해 시구자로 나섰다. 오릭스가 전신 구단(한큐 브레이브스·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의 분위기를 재현시키는 ‘LEGEND OF Bs2011 되살아나는 황금의 70's’시리즈의 제1차전에 따른 것에 의한다.
[173]
문서
1회초 24개는 일본 타이 기록, 1회말 19개는 퍼시픽 리그 기록.
[174]
문서
타이틀을 석권한 횟수가 13회를 차지한 것은 일본 기록.
[175]
문서
수상 횟수가 12회를 차지한 것은 일본 기록.
[176]
문서
1980년 야마자키 히로유키, 1983년 가도타 히로미쓰와 동률을 이룬 프로야구 역대 최다 볼넷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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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시리즈 타이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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